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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124승..동영상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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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가 드디어 해냈다. 124라는 숫자. 그리고 승리.
그의 팬들이나 박찬호 스스로도 처음부터124라는 숫자를 목표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200 혹은 250을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을까?
박찬호는 그만큼 대단한 투수였고 17년과 124승이라는 숫자는 그의 선수생활의
굴곡과 역경,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그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숫자다.


94년 가을을 기억하는가

잘생긴 얼굴에 덩치가 좋은 한 청년이 메이저리그팀인 다저스와 계약했다.
언론들은 박찬호를 헤드라인에 담으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고, 그럴만도 한
것이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17번째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선수가
되었다. 물론 다저스에서도 홍보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센세이셔
널한 돌풍을 몰고 왔다. 다리가 찢어질듯한 놀란 라이언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하이키킹에 강속구, 제구력은 형편없었지만 그 모습 자체로 박찬호가 최고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2년간의 마이너

하지만 그 뿐이었다. 박찬호는 구원으로 두경기에 나와 방어율 11.25만을 기록하고
내려간다. 사실 풋내기에 불과한 박찬호에게 메이저리그의 달콤한 맛을 보여주고
마이너에서 수업을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구단주와 단장은 아시아에서 
100마일을 던지는 괴물을 데려왔다는 것을 팬들에게 보여주는, 그들의 능력을 돋보
이게 하려는 홍보의 자리였을 뿐이었다. 아마도 모두가 이때의 박찬호의 하이키킹을
기억하지 않을까? 다저스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진짜 데뷔

95년의 2차례등판을 거쳐 96년에는 진짜 데뷔를 한다. 구원으로 주로 나오면서
10번의 선발. 5승5패 3.64. 포스트시즌에도 참가하며 본인의 가치를 보여줬다.
센세이셔널한 하이키킹은 줄어있었지만 박찬호의 기량은 그만큼 성숙해있었다.
이후 97년부터의 모습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모두가 기억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14승 3.38의 방어율로 시작해서 15승, 13승, 18승, 15승.
2001년까지 5년동안 75승 49패. 연평균 15승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준다. 박찬호가 거둔 124승의 60%가
이 5년동안 거둔 것이다. 9회에도 96마일을 꽂아 넣던 박찬호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97년 외환위기와 그의 활약이 겹치면서 많은 국민들이 힘들 얻었으리라.
아마 평생에 다시 그런 감동을 느끼긴 힘들 것 같다.


장기계약 그리고 부상

사실 박찬호는 마이크햄튼의 계약을 뛰어넘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박찬호와 비교되었던 마이크햄튼었지만, 강속구의 정통파투수라는 박찬호의
장점은 햄튼이 넘볼 수 없는 것이었다. 메츠에서 뛰던 햄튼은 1년전 8년간 1억
2천1백만 달러라는 투수 역대 최고액에 계약했다.
보라스가 연평균 2000만달러를 흘리던 시점이던 2001년, 박찬호는 전반기 사이영
상에 가까운 엄청난 호투를 선보이지만 시즌 후반기 시작 즈음에 가까워 허리부상을
입는다. 공을 던지기 힘든 상태였지만 FA를 앞둔 박찬호와 보라스는 시즌강행을
하는 무리수를 둔다. 박찬호의 커리어에 남아있는 본즈에게 맞은 71호, 72호의 홈런도
이때 나온 것이다. 
박찬호의 부상은 박찬호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박찬호는 하는 수없이 톰 힉스 구단주
(현재 리버풀구단주....)가 있던 투수들의 무덤 텍사스와 5년 7100만 달러의 조건으로
계약한다. 


텍사스와 박찬호

2002년, 텍사스팬들은 기억조차 하기 싫은 역시 박찬호의 팬들조차 기억하기 싫은 
박찬호의 텍사스생활은 시작된다. 허리가 아프면 쉬었어야 하지만 대형계약을 한 
박찬호는 쉴 수 없었고,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은 몸상태가 정상이 아닌 박찬
호를 더 궁지로 내몰았다. 2002년의 무리는 박찬호의 선수생활을 바꿔놓는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보자면 2001년 욕심을 내지말고 천천히 쉬면서 다음 FA를 노렸으면 어땠
을까? 인생은 박찬호에게도 쉬운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부상으로 박찬호는
최악의 길을 걷는다. 그가 쌓아왔던 명성과 강력한 투구는 몸값 못하는 '먹튀'라는 오명
앞에 묻히고 만다.
활을 튕기듯 앞으로 튕겨져 나가는 역동적인 투구폼이 문제가 되었으리라는 의견도
있고, 박찬호가 선천적으로 척추측만증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어쨌든 확실한
건 박찬호가 5년간 너무 많은 이닝을 던졌고 (192-221-194-226-234)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했다는 점이다. 순간적으로 많은 부를 얻었지만 또다른 많은 것들은 잃었다.
과욕이었을까? 하지만 박찬호가 아닌 그 누구라도 2001년의 FA를 포기할 수 있었을
까. 인생은 역시 쉽지 않다.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 그리고 방출

2005년까지 22승 23패에 5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한 박찬호는 시즌 도중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 된다. 박찬호 남은 연봉중 상당액을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역시 활약이 없던
타자 필네빈과 유니폼을 바꿔 입는다.
텍사스에겐 불행으로 끝난 박찬호 영입이었다. (톰힉스는 A로드에게 안긴 10년 2억5천만
달러의 계약과 박찬호의 6500만달러의 과잉 투자로 이제는 한때 박찬호의 우상이었던 놀란
라이언에게 구단주지위를 넘겨주고 말았다.)

2006년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7승7패 4.81의 평범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자신을 옥죄었던 굴레였던 6500만달러짜리 장기계약을 끝마치고 다시 FA자격을
취득한 박찬호는 2007년 메츠와 개런티60만달러에 계약하지만 한경기 만에 방출당한다.
이 때 모두는 박찬호의 재기를 힘들다고 봤다. 이제 할만큼 하고 벌만큼 벌지 않았느냐는
여론도 모아졌다. 
  '끝났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찬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00만달러를
받은 에이스 투수가 마이너리그생활을 감내하면서 원정 숙소에서 컵라면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박찬호는 힘든 마이너리그 생활을 견뎌내면서 다시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남은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편해졌을
것이다. 그의 커리어와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포기하면 박찬호는 영원히 한번 잘할때 반짝 벌고 그만둔 선수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물론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다저스로 그리고 월드시리즈

2008년 자신의 고향과 같았던 다저스로 다시 돌아간다. 과거의 센세이셔널한 강속구
투수도 선발투수도 아니었지만 박찬호는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라는, 논개런티계약을
하고 다저스에 한번 더 도전한다.
박찬호는 멋지게 재기에 성공한다. 더이상 선발투수도 아니었고 고액연봉자도 아니었지만
박찬호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투구를 한다. 그리고 2009년에 필라델피아에
이적해서는 꿈에 그리던 월드시리즈에도 진출한다. 팀의 존경도 얻고 꽤 괜찮은 계약
조건도 제시받지만 박찬호는 한번 더 도전을 선택한다. 꿈에 그리던 챔피언 반지를
얻기 위해 양키스에 입단하지만 아쉽게 시즌  중 방출 당한다. 챔피언반지는 어려워짐과
동시에 아시아 최다승인 노모의 122승에 단 1승을 남겨둔 상태여서 아쉬움이 더 
컸다. 구위가 떨어져서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박찬호는 피츠버그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다.


그리고 오늘.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오늘이다. 박찬호는 본인이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이루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노력에 대한 댓가를 지불 받았다. 그리고 150km를 넘는
9명의 타자를 상대해서 퍼펙트와 함께 6개의 삼진을 잡았다. 그의 선수생활과 팬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그 감동은 메이저리그 첫 완봉승을 거두고, 18승과 99마일의
강속구를 던졌던 때보다 더 컸으리라.
17년의 메이저리그 생활 중 5년간 거둔 75승, 그리고 마지막 4년간 거둔 11승.
수치상으로는 비교되지 않을지 몰라도, 마지막 11승의 가치는 75승에 못지 않는
가치가 있다.
나머지 12년의 49승이 있었기 때문에 5년간의 75승을 더해 124승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4년간의 11승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의 진정한 노력과 도전의
결실이다.

박찬호의 선수생활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까? 올시즌이 끝나고 박찬호는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아무것도 결정난 것은 없다. 박찬호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는 확실하지 않을까? 아직 박찬호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p.s 워낙 오랜만에 글을 쓰다보니 잘 쓰여지지 않네요. 그래도 오늘 느낌 감동을 적으려고
노렸했습니다.  forever 박 찬 호.